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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이단 영지주의 분석및 비판서적 '영지주의'(송혜경 저).

그리스도의 이스라엘(Christal Israel) 2024. 1. 7.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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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이단 영지주의의 민낯을 파헤친 정통기독교 변호도서, '영지주의'

 

이 책은, '기독교이단 영지주의'를 알고 파악해 맞서 대응하기위한 교양지식을 쌓기위해 구입하였다.

 

책 저자가 천주교(가톨릭)신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호하는 신앙이 마음에 들었고,

 

특히, 영지주의를 비롯한 뉴에이지(종교문화운동) 신지학(블라바츠키) 시크릿(론다번) 등을 비판한 것도 마음에드는 대목.

 

다만 이책 제목이 말하듯 영지주의에 대해 백과사전처럼 여러챕터 즉 기원, 역사, 경전들, 종교적기능, 신화, 모티프, 성찰

 

이런식으로 챕터를 나눠서 분석했는데 책 분량이 그리 길지않은데 비해 알찬 지식들이 많이 기록되어 가성비가 좋다.

 

물론, 그러면서 이 책의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영지주의와 타협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음을 간접 표현하고,

 

책 중간에서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 신앙을 변호하며 영지주의 지식보다 지식을 초월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엡3:19)

 

이 영지주의의 지식으로 인한 구원론보다 위대하다고 주장한 내용이 것이 이 책의 최대 가치이자 의미가 아닌가 싶다.

 

영지주의도 기독교에서 파생된 이단이며 특히 플라톤철학 및 불교 힌두교 카발라(유대교 신비주의)와 짬뽕된 잡탕종교다.

 

책 내용중에 일단 몇가지 내용만 추려서 블로그에 올려보겠고,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면 책사서 읽어보세요. (아래링크)

 

 

 

*** 영지주의(송혜경) 책 내용 ***

 

 

42쪽

 

영지주의의 기원을 이란과 인도의 종교와 사상에서 찾는 학자들도 있었으나 지금은 이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추세다. 묵시주의와 계시, 메시아 대망사상, 신비주의적 금욕 공동체들로 특징지을 수 있는 이집트와 중동 땅이 영지주의가 탄생하고 발전한 요람이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옳을듯하다.

 

 

53쪽

 

모든 영지주의 교사에게 가장많은 영감을 준 사람은 바오로(바울) 사도였지만 발렌티누스도 바오로만큼이나 다른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바오로 사도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테우다스(테오다스)의 제자였다고 전해진다. 사실 바오로 서간에서 영지주의의 씨앗이 된 요소들이 적지않게 발견된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선택된 사람들만 알 수 있다는 "숨겨진 신비들"과 "숨겨진 지혜"가 그 예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것은 바오로의 특정 가르침이나 단어가 아니다. 그보다는 바오로 사도가 다른 사도들과 달리 예수님의 제자로서 키워진 사람이 아니라 자신만의 체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이었다. 영지주의자들이 보기에 다마스쿠스(다마스커스) 체험은 그노시스 체험과 다를바 없었다.

 

바오로가 셋째하늘까지 들어올려진 사실을 이야기하는 대목도 영지주의자들의 시선을 끌었음에 틀림없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어떤 사람을 알고있는데, 그사람은 열네 해 전에 셋째하늘까지 들어올려진 일이 있습니다. 나로서는 몸째 그리되었는지 알길이 없고 몸을떠나 그리되었는지 알길이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낙원까지 들어올려진 그는 발설할 수 없는 말씀을 들었는데 그 말씀은 어떠한 인간도 누설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2코린12,2-4; 고린도후서12:2-4) 이어서 사도는 자기가 들은 계시 말씀은 엄청난 것이기에 자랑하지 않겠다는 말을 덧붙인다. 영지주의자들이 보기에 바오로의 이 체험은 분명 영지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깨달음과 영혼의 상승 체험이었다. 따라서 발렌티누스가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과 체험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은것도 당연한 일어었을 법하다.

 

발렌티누스도 환시로 주님을 만났다고 주장한다. 로마의 히폴리투스는 발렌티누스가 겪었다는 환시체험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갓 태어난 아기를 보고 그 아기에게 누구인지 묻자 아기가 자신은 로고스(말씀, 요1:1-3)라고 대답하였다는 것이다. 발렌티누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환시로 아기예수를 만난 최초의 인물이자 예수님이 로고스시라는 계시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69쪽

 

유스티누스(철학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자이면서 그리스도교 호교론자/수호론자)의 저작물을 통해 초창기 영지주의 교사들에 대해 귀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정통과 다른 가르침들을 소개한 그의 저술은 후대 저자에게 알려져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리스도교(기독교) 신앙을 옹호하는데 그리스철학을 활용한 점은 다른 저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72~73쪽

 

한편 이레네우스가 영지주의자들과 싸울때 가장 큰무기로 삼은것도 구약성경이고 신약성경에 포함시킬 본문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중점을 둔 사항도 구약성경과의 연속성이었다. 그래서 구약성경이 나자렛 예수와 관련이 없다거나 구약의 하느님과 예수님의 하느님이 전혀 다른 분이시라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은 잘못이라 주장하였다. 이레네우스는 구약과 신약, 구약의 하느님과 신약의 하느님 사이의 연속성과 일치를 믿었다.

 

이레네우스는, 지금 신약성경에 포함된 네 복음서 곧 마태오(마태), 마르코(마가), 루카(누가), 요한 복음서만을 진정한 복음서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최초의 정통 그리스도인이기도 하다. 이전의 저술가들이 네 복음서에서 두루 인용하기도 했지만 이레네우스가 처음으로 '네 복음서'를 주창하였다. 이레네우스에 따르면, 복음서는 더도말고 덜도말고 오직 넷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사방으로 되어있고 바람도 네 방향으로 불듯이 교회가 네 기둥만을 가지는것이 당연하다. 만물을 품고계신 그분께서, 네 측면을 지니며 한분이신 영에 의해 묶여있는 복음을 주신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와 히폴리투스

 

2-3세기경 그리스도교 교사들은 영지주의자이든 아니든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철학과 관련지어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레네우스를 위시한 정통교부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철학과 영지주의 사고방식에 빠져드는 것을 반대하고 이를 막기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92~93쪽

 

융이 영지주의자였는지 아닌지를 두고 학자들 사이에서 이견이 좁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융이 계발한 인간 심리학의 모델은 20세기 영지주의에 다름아니다.

 

융은 고대 영지주의 지혜를 다시일으키고 영지주의 개념과 신화들과 이미지들을 분석 심리학에 노련하게 적용할줄 알았다. 영지주의에 기울인 관심때문에 융은 때로 비판의 표적이 되기도했다. 마르틴 부버는 융을 영지주의자로 부른다. 종교학자 로버트 세갈은 융이 부적절한 방식으로 영지주의를 오용했다고 비난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이 세상을 벗어나는데만 관심이 있었으므로, 그림자의 통합이론같은 융의 심리학적 이론들은 영지주의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세갈의 비판에 대해 융은 자신이 영지주의를 오용한 적도, 그것을 심리학으로 전환시킨 적도 없다고 응답한다.

 

융이 심리학자로서 영지주의 작품에서 심리학적 의미들을 찾은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융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고대의 신화와 가르침을 해석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그가 영지주의에 기여한 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다. 특히 융은 [욥에게 답하다]Answer to Job라는 책에서 데미우르고스(구약의 창조주;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영지주의 가르침을 독창적으로 발전시키고 확장한다.

 

융이 심층 심리학을 전개하면서 영지주의 신화에서 많은 영감을 얻은것은 사실이다. 융은 마지막 영지주의자라 불리기도 한다. 이 말은 융 이후 영지주의 전통이 끝났음을 함축한다. 그러나 영지주의는 아직 완전히 사라진게 아니다. 아직도 여러형태, 여러이름으로 살아있다.

 

 

107쪽

 

사실 대부분의 영지주의 작품에 등장하는 예수님은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때문에 죽은이를 일으키고 질병을 고치거나 기적을 일으키는 정경속 모습과는 거리가멀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사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영적스승, 영혼들을 인도하는 사람, 합당한 사람들을 그노시스(영지)에 입문시키는 영적 지도자로 등장한다.

 

 

113쪽

 

물론 영지주의가 하나의 독자적 종교로 존재했다고는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유다교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적 토양 아래서 생겨나고 발전했으며, 인간의 영혼을 해방시키기 위한 성사를 갖춘 체계라는 점에서 하나의 종교, 아니 그리스도교의 일부였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원-정통 교부들에 의해 이단으로 배척되긴는 했지만 그들역시 그리스도교 안에서 자라났으며 하느님의 세계와 인간에 대한 나름의 견해를 갖추고 성사와 전례를 행한 종교 공동체였다. 단순히 철학과 사변을 즐기던 불특정 다수의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안에서 2-3세기 꽃을 피운 영지주의를 '영지주의 그리스도교' 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132~133쪽

 

교부들이 지적한대로 영지주의자들의 창조신화는 구약성경 창세기에서 모티프를 따왔다. 그들의 신화에서는 창세기의 주인공들인 아담, 하와, 셋과 뱀이 크게 부각된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현실적 인물 혹은 현 세상의 인물로, 다른 한편으론는 초자연적 실체로 등장한다. 창세기의 주역들이 영지주의 신화에서는 현실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영적 존재로서 그려진다.

 

영지주의 신화는 플라톤의 영향도 크게받았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우주의 창조가 제일 원리인 신적 존재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우주는 제일 원리를 중심으로 해서 점차 바깥으로 확장되었다. 물질도 존재하지만 제일 원리가 창조한 것은 아니다. 물질은 스스로 존재하며 원래부터 무질서한 혼돈(카오스 chaos) 상태다. 제일 원리와 물리계 중간에 데미우르고스(장인이라는 뜻이다)라는 중간적 존재가 있었다. 이 데미우르고스가 혼돈 상태의 물질을 우리가 사는 물질계로 만든 장본인이다. 데미우르고스는 만물을 만들때 더높은 세계의 유형을 따라 만들었다. 그러나 물질이 본성상 흠을 지니고 있기에 물질에서 만들어진 물질계 역시 그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다. 물질계도 흠과 결점을 지닐 수밖에 없는것이다. 영지주의 신화에 담긴 창조주와 창조관념이 플라톤(철학자)의 생각과 비슷하다.

 

 

137~138쪽

 

이처럼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철학의 도움을 빌려 창세기 이야기를 재구성했다.(..이하생략..)

 

 

143쪽

 

그리스도는 어느 에온에게서?

 

같은 발렌티누스파에 속한 사람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은 조금씩 달랐다. 특히 그리스도가 어떻게 생겨났느냐에 대한 의견은 천차만별이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같은 발렌티누스파라 하더라도 주 예수님에 대한 생각은 서로 달랐음을 전한다. 주 예수님이 플레로마의 모든 에온들로부터 유출되었다고도 하고 '말씀'과 '생명'이라는 에온 쌍에게서 유출된 열 에온에게서 나왔다고도 한다. 어떤이들은, 예수님은 '사람'과 '교회'라는 에온 쌍에게서 유출된 열두 에온에게서 나왔으며 그러한 이유로 예수님에게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붙었다고 한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와 성령에 의해 만들어졌다고도 한다. 이처럼 예수님에 대한 생각도 천차만별인데 하느님에 대한 생각은 얼마나 달랐겠느냐, 하는 것이 테르툴리아누스의 비판이었다.

 

 

162쪽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철학자들의 초월신 개념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철학자들의 초월신과 구약성경의 창조주를 철저히 구분하면서 인간세상을 창조하고 인류역사에 개입하는 신은 진정한 신이 아님을 강조한다. (블로그주인 주註; 이단교리, 기독교이단 영지주의의 전형.)

 

 

168~169쪽

 

영지주의자들은 하와가 사악한 뱀에게 속아 하느님의 명을 어기고 나아가 아담까지 유혹하여 불순종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이 이야기를 살짝 비틀어 새로운 시각으로 재구성한다. 하와는 잘 속아 넘어가는 어리석은 여자도 아니고 유혹자도 아니다. 그녀는 현명한 여자, 천상의 지혜인 소피아의 딸이며 잠에빠진 아담을 깨우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 문헌에서는 대개 하와가 아담보다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170쪽

 

정통교회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열매를 따먹고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낙원에서 누리던 은총 지위에서 추락했다고 표현한다. 이것이 최초의 '타락'Fall이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은 이것을 '그들의 눈이 열렸다'고 표현한다. 지식(그노시스)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의 나무 열매를 따먹게 해준 뱀은, 지식의 계시자요 눈을 뜨게해준 구원자다. (블로그주인 주註; 뱀은 온세상을 속이는 사기꾼이라고 고후11:3, 요한계시록 12:9, 20:1-3 등등 여러성경구절에 기록됨. 뿐만 아니라 지식의 열매가 지식만을 줬을뿐, 절대불멸의 영원무궁생명을 누리는 천국낙원의 복을 주지못함이 선악열매의 핵심 특징이다.)

 

 

183~184쪽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문제는 예수님께서 오신 그때부터 지금껏 이어져온는 문제다. 정경의 네 복음서는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예수님을 바라본는 시각, 혹은 예수님께 기대한 내용이 매우 달랐음을 증명한다. 하느님께서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신 다윗가문의 메시아, 하느님의 아들,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 지혜의 말씀을 전하는 지혜의 스승,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킬 혁명가 등 사람들마다 각양각색의 시선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다. 무슬림들은 예수님을 예언자로서 공경하지만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데에는 반대한다. 무슬림들이 보기에 하느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성(性)과 출산은 육신의 일이며 신성에 걸맞지 않아보이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그들이 제시하는 예수님 상은 어떠할까? 그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엇이었을까? 영지주의자들이 예수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아는데에는 특히 토마복음서와 필립보 복음서가 큰 도움이된다. 두 복음서가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담고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이 예수님을 특별히 공경했다는 데는 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일면을 보았던 것이 틀림없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무엇보다 인류가 처한 현실, 곧 물질세상에 갇혀 자신이 천상에서 유래했음을 망각한 현실과 무지를 깨우침으로써 인류의 노예살이를 종식시킬 선각자이자 해방자이자 스승으로서 인식되었다. 예수님은 깨달음을 주는 분, 그리고 물질세계와 창조주의 지배하에 있는 노예살이에서 해방시키는 해방자이시며, 가르침과 성사(입문과 해방의 신비)를 통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셨다고 (영지주의자들이) 말한다.

 

 

208~209쪽

 

영지주의는 불교와도 유사점을 공유한다. 무엇보다 불교와 영지주의가 추구하는 목적이 같다. 다시말해 깨달음을 통해 물질에 갇혀있는 실존에서 해방된는것, 곧 해탈이다. 그밖에 둘사이의 유사점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구원은 지식, 곧 깨달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눈에 보이는 실존의 눈에 보이지않는 기원에 대해 깨달음을 얻는것이 해방에 이르는 길이다.

 

둘째, 무지가 악의 근원이다.

 

셋째, 영지주의 지식과 불교의 지식(깨달음)은 둘 다 일상적인 학습을 통해서보다는 내적 각성 혹은 내적 계시의 결과로 얻어진다.

 

넷째, 깨달음에는 단계가 있다. 영지주의에는 무지한 물질적 인간hyleticos과 깨달음을 얻은 영적 인간pneumatikos이 양극단에, 그리고 그 중간에 영적 깨달음이 잠재된 혼적인간psychikos이 있다. 불교에도 깨달음을 얻은 각자(覺者; 불타/붓다buddha)가 있으며 그렇지 못한자가 있다.

 

다섯째, 영지주의도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신과 합일하기 전까지 영혼은 윤회를 거듭한다고 한다. 불교에서도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들기전까지 윤회를 거듭한다고 가르친다.

 

 

211쪽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이 신과 구원자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말은 맞지만 그 의미가 그리스도교의 것과는 다르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영지주의자들의 하느님보다 더 적극적이시다.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당신을 보여주시며, 인간을 돌보아 주시고, 죄로 인해 당신에게서 멀어진 인간을 되찾으려 당신 아들을 구원자로 보내신다. 아들 예수는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분이시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의 하느님은 인간사와 무관하시며(그들에게 세상을 만든 창조주는 참 하느님이 아니며 인간을 구속하는 지배자일 분이다), 구원자도 인간에게 깨달음을 주는 자이지 인간을 대신해서 죽는자가 아니다. 인간의 깨달음을 도울 구원자가 필요하다고는 하나 그리스도교의 구원자처럼 절실한 존재는 아니다. 깨달음을 돕는 역할을, 자신을 바쳐 사람을 구하는 일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의 구원은 타력구원이라기 보다는 자력구원에 가까운 것 같다.

 

 

212쪽

 

오히려 영지주의자들은 대부분 금욕적인 삶을 살았던 것 같다. 후대의 마니교도나 카타르교도도 금욕주의로 유명했다. 실제로 영지주의는 극단적 금욕주의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이 세상 삶이 영혼의 유배살이에 지나지않고 육체는 영을 가두는 감옥일 뿐이라면 육체를 돌본는 일이 별 의미가 없을것이다. 심지어 출산은 또다른 유배살이를 만들어내는 일에 지나지 않을것이다. 따라서 혼인과 출산, 그리고 성생활은 지향해야 할일이 아니라 지양해야 할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 성적 방종과 영지주의는 별로 맞지않는듯 하다.

 

 

216쪽

 

이런의미에서 염세주의와 허무주의는 영지주의자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의미를 두는 사람이라면 영지주의자라 할 수 없고, 거꾸로 참된 영지주의자라면 이 세상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을것이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은 세상을 변화시키는데에 관심이없다. 그보다는 세상을 초월하는데 주력한다.

 

영지주의가 지닌 위험한 요소가 바로 이 점이 아닐까? 세상에 모든 의미를 부여해서도 안되지만 아예 세상의 의미자체를 부정해도 안된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다. 세상은 하느님께서 좋게 만드시고 인간에게 삶을 펼칠 장소로 주신곳이다. 인간에게는 이 세상을 하느님께서 만드신대로 좋게 유지하고 꾸밀 책임이 있다. 세상을 악신인 창조주의 피조물이며 우리를 가두어 두는 감옥으로만 여긴다면 이 세상도, 그곳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급기야 생명의 경시나 세상에 대한 책임회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영지주의자들에 의하면) 세상은 우리가 책임져야 할 곳이 아니라 하루빨리 벗어나야 할 감옥일 뿐이며, 죽음만이 이 감옥을 벗어나는 길이 될 터이기 때문이다.

 

 

221~222쪽

 

지금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죄와 고통에 대해 하느님께 원망을 돌린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데미우르고스와 같은 악신으로 여기기 때문은 아닌지 의심해 보아야한다. 하느님을 우리를 지배하고 감시하는 재판관으로 여긴다면 이또한 그분을 오해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한다. 영지주의자들이 창조주를 변덕 심하고 인간과 세상을 제멋대로 지배하는 심술궂은 억압자로 여겼듯이 우리또한 은연중에 하느님을 그런 신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하느님의 변덕스런 마음을 진정시켜 재앙을 피하고 궁극적으로 죽은뒤 지옥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닌지 깊이 성찰해 보아야한다.

 

우리는 모두 (적어도 거의모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구원은 갈망한다. 이 세상에 있으면서 충만한 기쁨과 지극한 행복에 싸여 더이상 바랄게 없이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결핍감과 막연한 동경을 짐처럼 짊어지고, 낙인처럼 새기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간의 운명이다. 그러니 인간이 구원을 바란다고해서 비굴하다고 느낄 필요는 없다. 그러나 구원을 받기위해, 아니 더 정확히 지옥을 피하기위해 억지로 하느님을 숭배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오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유다교(유대교)와 그리스도교(기독교)가 가르치는 하느님은 사랑때문에 인간을 만드시고 그들의 구원을 바라시는 분이시다. 데미우르고스처럼 자신을 시중들라고 인간을 만들고 마음대로 지배하고 휘두르는 독재자 폭군이 아니시다.

 

만약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넘어서 하느님께 대해 증오섞인 공포를 가지고 있다면 자신의 하느님 상이 잘못되지 않았는지 심각히 고민해 봐야한다. 그것은 알게모르게 영지주의자들의 창조주를 믿는 것이겠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면서도 실제로는 영지주의자들의 창조주를 믿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깨어있으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깨어서 읽고 생각하고 물어보자. 그리고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이름만 그리스도인인지 숙고하자. 영지주의자를 이단이라고 비난하기전에 자기가 교회의 가르침과 '다른 가르침'(이것이 이단의 본뜻이다)을 믿고있지는 않은지 한번쯤 자문해볼 일이다.

 

다른편에서의 반성도 필요하다. 평화의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틀림'에 눈감고 모른척 덮어두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오늘날 각종 신흥 종교들이 그리스도교라는 이름을 내걸고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있다. 종교의 옷을 입지않은 많은 문화운동과 뉴에이지 운동들도 거의 종교와 같은 역할을 하고있다. 이런운동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영지주의적 사고방식이 얼마나 깊이 침투해 있는지 놀라게된다. 물론 그런 운동들이 영지주의임을 자부하지는 않겠지만 영지주의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음을 감지할 수 있다.

 

 

224쪽

 

이처럼 현대인들은 각종 운동과 신흥종교에 무비판적으로 노출된 채, 자신도 모르게 영지주의의 영향아래 놓여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왔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고 하였다. (루카 12,49-51; 눅12:49-51) 예수님은 평화를 사랑하시지만 무비판적인 외면상의 평화는 반대하셨다. 필요한싸움, 필요한논쟁은 해야한다. 영지주의가 정통 그리스도교 신앙에 위배된다면 평화라는 미명하에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서는 안된다. 교부들이 영지주의와 싸웠던 이유도 그래서였다. 영지주의자들의 논리와 주장을 그들의 입장에서 듣고 이해하는 관용이 필요하지만, 그들의 주장이 '다름'이 아니라 '틀림'이라면 그것을 배척하는 용기도 필요하다. '틀림'을 용인하는 것은 거짓평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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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주의 | 송혜경 - 교보문고

영지주의 | 이 책에서는 영지주의와 정의와 역사를 더듬어 보고, 18세기 이후에 발견된 사본들을 토대로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과 관습을 살펴 본다. 영지주의의 역사에는 고대 영지주의뿐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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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참고할 기독교변호 서적, 사탄이즘(Satanism) 엑기스 내용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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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이즘(Satanism)과 성경(Bible) 비교 요약.

주의할점: 사탄주의자의 소신들을 세가지 이유로 직접적으로 인용하기보다는 각각의 보기 안에서 요약했다: (1) 사탄주의자들은 어느누구의 의견이라도 권위있게 보거나 혹은 모든 사탄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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