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기초/목사저서

몸이 다시 사는것에 대한 믿음.

그리스도의 이스라엘(Christal Israel) 2023. 9. 23.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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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다시살고 영원히 사는것을 최대의 소망으로 가지고있다. 사람들이 서로 인사를할때 다시보자 하는 인사를 한다. 이는 다시보기 어렵다는 것이기에 다시보는것을 바라고 인사로 한다. 사람들이 죽을때 지하에서 만나자 하는 말을 하나 믿는 사람들은 확실히 천국에서 만나게 됨을 말한다. 그래서 믿는사람은 소망으로 가득하고 죽음의 자리에서도 환송하는 예배를 드리게된다. 우리 기독교는 부활하여 영원히 사는것을 믿는 종교이다.

 

1. 사람의 죽음에 대하여

 

죽음은 최초로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사람에게 왔다. 창 2:17에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관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였다. 이를 아담이 어기고 먹어서 하나님께 범죄하여 죽음이 오게되었다.

 

죽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를 영원한죽음이라 한다. 그리고 영과 육이 분리되는 것을 임시적인 죽음이라 한다. 아담이 영의 죽음이 있었기에 육의 죽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는 나무의 밑줄기를 잘라내었을때에, 그 나무를 임시적으로 산 것같이 만들어 놓을 수 있다. 잎은 산것같고 때로는 부분적인 움싹이 나와도 이 나무는 결과적으로 죽은것이다. 죽음에 있어서 영은 단회적으로 죽고 육은 서서히 죽는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라기도 하지만 이것은 한계적이지 계속 자라지는 못한다. 고로 사람의 나고죽는것이 하나님의 정함에 달려있는 것이다. 의사나 과학자는 사람의 수명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하여 오래사는 방법을 연구하지만 결국 사람은 다죽고 마는 것이다. 고로 세기를 거듭해서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화장, 매장 혹은 수장을 하나 결국 흙으로 돌아가고만다. 이는 사람의 근본이 흙이기에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몸이고 영은 하나님이 호흡으로 주신 것이기에 하나님이 신령계로 인도하신다. 믿는자의 영이 산 것이기에 앞으로 다시 자기의 몸을 덧입는 것이 부활체로 이끄는 것이다.

 

2. 기독교는 몸의 죽음이 끝이 아니다.

 

사26:19에서 '주의 죽은자들이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한다. 단12:2에서도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자도 있겠고' 하였다. 기독교는 삶의 종교이며 부활의 종교이다. 세상에서의 죽음은 임시적인 죽음이고 다른 신령한 몸으로 덧입기위한 방편적인 죽음이 되는것이다.

 

** 벌레가 나비가되고 매미가 되기도한다. 이때 흙에서 살던 몸은 버리고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새로운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물질이 아니라 비물질이며 우리의 마음도 비물질이다. 이를 중심해서 살 몸으로 다시사는 것이다. 이를 조금이라도 믿게하려는 방법으로 자연계에서 계시로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든지 혹은 진리를 알려주실때에 죽은자를 잔다 하였는데, 마10:28에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자들을 두려워하지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서 멸하신는 자를 두려워하라' 하였다. 살전4:13- 에서 자는 자들에 관하여 말씀하시기를 다 잠자지 아니하고 주님의 강림시에 자는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우리도 순식간에 변화한다 하였다.

 

3. 어떤 몸으로 다시 사느냐.

 

예수님이 우리에게 견본적인 부활을 해서 보이셨다. 고전 15:20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살아 잠자는자들의 첫열매가 되셨도다' 하였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열매가 도셨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이신 몸은 어떠한 몸인가.

 

1) 물체를 초월한 몸이다.

 

몸은 물체의 제한을 받기에 가두어 놓으면 나갈 수 없고 묶어놓으면 움직이지 못하고 물체가 가로 놓여 있으면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문을 닫고 방안에 있을땡 그 중간에 나타나시면서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하셨다.(요20:19-23) 이같이 물체의 제한을 받지않는 몸으로 문득 나타나시기도 하고 없어지시기도 하는 몸이셨다.

 

2) 보여줄 수도 보이지 않을수도 있는 자유가 있다.

 

눅24:13-35에서는 엠마오로 가는중에 제자들과 같이 길을 가면서 대화하셨는데 저녁을 같이 들다가 제자들이 알았을때는 문득 없어지셨다. 그리고 도마에게도 내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고 나인줄 알고 믿는자가 되라 하셨다.

 

3) 음식을 초월하시기도 한다.

 

요21: 에서는 제자들에게 조반을 먹으라 하고 잡수시었고 엠마오 제자들과도 음식을 잡수시었다. 그러나 주님의 몸은 그 음식이 없어도 얼마든지 산 몸으로 부활을 하였다.

 

4) 일시에 많은 사람에게 나타나셔서 대화하시고 교제하시는 몸이시다.

 

고전15:6에서 500인에게 일시에 보이셨단는 것은 500인이 한 장소에 모여있을때 보이신것이 아니라 여러장소에 흩어져 있을때 일시에 나타나 보이신것을 의미한다. 즉, 각 지역과 장소를 초월하여 일시에 많은사람들과 대화나 교제를 할 수 있는 몸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베드로에게도 보이시고 또 고넬료의 가정에도 보이시고 거리상의 관계나 시간상의 관계를 떠날 수 있는 몸이다.

 

5) 동시에 두가지 일도 하실 수 있다.

 

부활이후에 예수님은 여러사람들에게 40일동안 보이셨다. 위로하고 담력을 주고 교훈하고, 필요할때는 언제나 나타나서 응원을 하였다. 그러나 시간과 장소에 제한을 받는 몸으로는 국한되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문득 나타나기도하고 없어지기도  하였다. 베드로에게는 이방인도 깨끗하니 고넬료의 집으로 가라 하기도 하고, 고넬료의 집에서는 가서 베드로를 청하라 하기도 하였다.

 

6) 음성이 실체적으로 일과 똑같은 효력을 나타낸다.

 

음성으로 일을하여도 효력이나 능력이 같고 실체적으로 이를 하여도 효력이나 능력이 같고 실체적으로 일을 하여도 효력이나 능력이 같다. 마8:5- 에서 예수님께 백부장이 내 집에 오시지 아니하고 말씀으로만 하여 주십시오 할 때에 이스라엘에게 이만한 믿음을 만나지 못하였다고 칭찬을 하였다. 예수님의 능력은 실제로 가서 일을 하여도, 말씀으로 하여도 다 동일한 일이요, 능력이나 효력이 발휘되는 것이다. 행 9:3-9에서는 바울이 다메섹으로 갈 때에 빛으로 나타나셨다. 이때는 음성으로  지시하셨는데 그대로 다 이루어졌다.

 

7) 무소부재하신 분의 몸이셨다.

 

예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살피시는데, 계2:3에서 일곱교회를 다 살폈다. 그리고 계1:17-20에서는 처음이요 나중되신 예수님이시고, 13절에서 일곱 금촛대 사이로 다니시면서 교회를 살피고 보호하고 감독하고 관리하고 능력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부활체도 이같이, 다시는 아픈것이나 쇠하는 것이나 이별이 있을 수 없고, 다만 영광과 자유의 몸으로 부활될 것이다.

 

4. 우리의 부활의 단계로는

 

1) 영 부활의 단계가 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우리의 영이 하나님과 단절이 되었다. 이는 영의 죽음이며 또 영원한 죽음이다. 이 단계에서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로 물과 성령으로 다시나게 하였다. 이를 중생이라 하는데, 이는 내 힘으로 된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힘으로 중생이 된 것이다. 성령님의 살아있는 영원한 말씀으로 중생을 시켰다. 아담의 타락으로 영이 범죄하여 하나님과 단절이 되었어도 그 영의 형체가 없어진것은 아니라, 기능을 할 수 없게 된것이다.

 

** 전기 시설이 가설되었어도 원선과 단절이 되면 사용할 수 없게된다.

 

이것이 생명의 연결을 통해 다시 하나님과 연결이 되었다. 이는 주님이 다 해 주어서 부활이 된것이다.

 

2) 기능부활이다.

 

하나님을 믿고보니 전에 불의의 병기로 쓰여지던 몸이 이제는 의로운 병기로 쓰여지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몸이 하나님을 위해서 쓰여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경건한 생활이라 한다. 경건은 하나님을 위하는 생활이다. 동기도 목적도 방편도 결과도 하나님을 위하는 생활이 경건이다. 이 생활을 통해서 기능 부활이 된다. 기능은 계속 연습을 하면 자라게 된다. 글씨를 잘 쓰는 것, 운동을 잘 하는 것, 피아노를 잘 치는 것 등, 잘 못하는 사람이 열심히 연습을 하면 그 기능이 자라게 된다. 이같이 우리도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못하던 것이 하나님을 위하고, 말미암고, 인하여 사는 연습을 계속하면 몸의 기능이 되어지는 것이다. 이 실력이 영의 기능이 되고 부활체의 실력이 되는것이다. 이 기능부활은 현재 재세하는 기간에 우리가 할일이다.

 

3) 몸 부활이다.

 

이 몸의 부활은 주님의 재림시 주님이 시킨다. 이 부활은 부활할때에 영이 몸의 도구를 차지하는 것이다. 이 부활은 기능부활을 시킨만큼의 실력을 영에 입혀주는 부활이니 세상에서 믿은 믿음의 실력을 따라 부활이 되는 것이다. 고로 부활체는 실력자가 있는데 세상보다 더많은 격차성이 있게되는 것이다. 천국에는 영광과 자유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큰 자와 적은자가 있다.(고전15:40-42, 마5:19-20)

 

5. 실력을 키우는 방편

 

부활체의 실력을 키우기 위하여 이 땅에서 사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이것을 위한 것이다. 벌레는 나비가 되지만 그 벌레의 크기에따라 나비가 되는것처럼 우리의 기능을 잘키운것 만큼의 실력이 부활의 실력이 되는것이다.

 

세상에서 우리에게 있는것은 씨와 양식이다. 씨는 심기위한 것이고 양식은 심는데 필요한 양식이다.(고후9:10) 심는다 하는거슨 우리에게 있는것을 성령과 진리에 의해서 쓰여지고 버려지고 없어지게 하는것을 말한다. 건강이라든지 재물이라든지 지식이라든지 다 성령과 말씀으로 버려지고 던져지고 없애버리는 것이 심는것이다. 우리의 가지것은 이왕에 없어질 것이니, 이를 생명에게 삼키게 하여 성령에 의해서 쓰여지도록 할것이다. 심는원리는 고전15:42-44을 준해서 보자.

 

1)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않을 것으로 거둔다.

 

자연적인 면에서 아담에 속한것은 다 썩을 것이다. 세상에는 썩지않을것이 하나도없다. 세상에서 유한한것은 다 썩는다. 이것을 주께 속하게 해야한다. 그러면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 하였다.(15:54) 그리하여 이젠 썩지않을 것으로 다시 살게된다.

 

2) 욕된것으로 심고 영광된 것으로 다시산다.

 

욕된것이란 상호관계 속에서 되어지는 것으로 자기만 위하는 것을 말한다. 자기를 중심해서 세상만을 위해 사는것은 다 욕된 것이다. 영광이란 자기 혼자서는 영광이라 못하고, 다른사람에게 알려지고 다른 존재와의 관계속에서 영광이라 한다. 그림을 제아무리 잘그렸다해도 남이 알아주지 않는이상 영광되지못하고 인격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다른사람이 알지못하면 영광되지못한다. 하나님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되심은 모든 피조무리 창조함을 받고 하나님께 찬송하기 때문이다. 자기만을 위하던 것이 주님을 위하는 것으로 바뀌고 신령한 하늘나라를 위하는 사람으로 되어지니 영광된 것으로 다시사는 것이다.

 

3) 약한것으로 심고 강한것으로 다시산다.

 

강하고 약하다 하는것은 능력면을 말하는 것이다. 능력이 있다는 것은 힘이 있다는 것인데 힘은 생명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생명의 주님은 예수님이시다. 주님을 제외하고는 생명이 없다. 고로 그리스도와 접선이 되어질때에 강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접선이 되어 생명이 된 이후에는 계속 자라고 흥하고 커져야 하는것이다. 나 중심한 것은 다 약하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접선되고 연관되어진 것은 다 강하다.

 

4) 육의 것으로 심고 신령한 것으로 거둔다.

 

육의 것과 신령한 것은 활동 범위를 말한다. 육의 것은 활동이 제한되어지는데 그것은 육이 물체의 제한을 받기때문이다. 그러나 신령한 것은 제한을 받지않는다. 이때 보이는 것을 다 주를위해 사용하면 이것이 제한을 받는 육의 것을 제한받지 않는 신령한 것으로 거두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고로 천국에 저축하고 세상것을 천국창고에 채워두기를 힘쓰라. 그러나 세상것은 하나라도 신령한 나라에 가지고 가지못한다. 다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쓰여질때에 주님으로 인하여 하늘에 심고 거두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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