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실체

[펌] 우려되는 뉴에이지 사상 '우주적 일치' 부분

그리스도의 이스라엘(Christal Israel) 2023. 7. 1.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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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cafe.daum.net/jybnagne/NieE/762

 

 

교황청 문화평의회와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

 

 

          생명수를 지니신 예수그리스도

 

                      (JESUS CHRIST THE BEARER OF THE WATHER OF LIFE)

 

 

                

                    '뉴에이지'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성찰

 

 

 

애니어그램은 대표적  뉴에이지 영성

 

뉴에이지 사상과 관행은 그리스도교적으로 식별해 볼 때 2-3세기의 영지주의처럼 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해 온 사상들을 요약해 놓은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이른바 뉴에이지를 가장하여 고대 영지주의 사상으로 회귀하는 것"에 대하여 경고하셨다. "우리는 이것으로 종교의 쇄신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이는 단순히 영지주의를 실천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 이러한 정신 자세는 하느님을 깊이 알고자 한다는 미명 아래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그 말씀을 순전히 인간의 말로 바꾸는 결과를 가져온다. 영지주의는 결코 그리스도교의 영역을 완전히 포기한 적이 없다. 오히려 영지주의는 언제나 그리스도교와 나란히 존재해 왔으며, 때로는 철학적 운동의 형태를 띠기도 하지만, 흔히는 분명히 종교나 유사종교의 특징을 띠며, 이러한 특징은 명시적이진 않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분명히 상충되는 것이다. 6) 그 한 예로 애니어그램을 들 수 잇다. 9가지 유형의 성격 분석 도구인 애니에그램을 영적 성장의 한 도구로써 사용하게 되면 교리와 그리스도교 신앙 생활에 혼란을 가져온다.

 

 

융 심리학의 위험

 

마릴린 퍼거슨은 물병자리의 음모(The Aquarian Canspi-racy)에서, 의식의 확장과 자아 초월 경험에 바탕을 둔 변화의 시각의 기초를 닦은 물병자리 시대의 선구자들에 관하여 한 장을 할애하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와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칼 구스타프 융도 들어 있다. 제임스는 종교를 교의가 아닌 경험으로 정의하였으며, 인간이 자신의 정신 자세를 바꾸면 자기 운명의 설계자가 될 수 잇다고 가르쳤다. 융은 의식의 초월적 성격을 강조하고 집단 무의식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집단 무의식은 서로 다른 세대와 문화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일종의 상징과 기억의 저장소이다. 보터 하네그라프에 따르면, 이 두사람 모두 뉴에이지 사상과 관행의 중요한 요소가 된 심리학의 신성화에 이바지 하였다. 사실, 융은 밀교를 심리학적으로 고찰하였을 뿐 아니라 심리학을 밀교 이론의 내용으로 채움으로써 심리학을 신성화하였다. 그 결과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그것이 자신의 영혼을 의미하고, 자신의 영혼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신성을 의미하게 하는 이론체계가 나왔다. 영혼이 정신이고 하느님도 정신이라면, 하나를 말하는 것은 곧 다른 하나를 말하는 것과 같다.33)  그리스도교를 심리학적으로 해석하였다.는 비난에 대하여 융은, 심리학은 현대의 신화이며 현대 신화의 관점에서만 우리는 신앙을 이해할 수 잇다.34)고 대답하였다. 융의 심리학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여러 측면, 특히 악의 실재에 맞설 필요성에 관하여(빛을) 밝힌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의 종교적 신념은 그의 삶의 단계마다 너무 달라서 하느님의 이미지에 혼란이 생긴다. 그의 사상의 중심요소는 태양숭배로서, 거기에서 하느님은 인간 안에 있는 생명 에너지(리비도)이다. 35) 융 자신도 말하였듯이, 이 비교는 말장난에 불과하다.36) 사실 융은 내면의 신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것은 그가 모든 인간안에 존재한다고 믿은 본질적인 신성이다. 내부 세계로 이르는 길은 무의식을 통한다. 외부 세계에 내부 세계가 상응하는 것은 집단 무의식 안에서이다.

 

 

융 심리학- 초월심리학

 

심리학과 영성을 서로 바꾸려는 경향은 1960년대 말 캘리포니아의 에살란 연구소가 발전시킨 인간 잠재력 운동에 깊이 새겨져 있다. 동양 종교와 융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자아 초월 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은 과학과 신비주의가 만나는 관상의 여정을 제시한다. 영체성(靈體性)에 대한 강조, 의식확장 방법의 추구, 집단 무의식의 신화에 대한 관심은 모두 인간 내부의 신에 대한 추구를 부추기는 것이었다.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려면, 자신의 깊은 곳에 있는 신이 되기 위하여 자아(ego)를 초월하여야 한다. 이는 명상이나 초심리학적 체험, 환각제 사용 등과 같은 적절한 치료법을 선택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신 그리고 우주와 융합하는 절정의 경험, 신비적경험에 이르는 방법들이다.

 

심리학은 신비주의적인 체험인 정신의 확장을 설명하는 데에 쓰인다. 요가,선, 초월명상, 탄트라 수행등은 자기 실현이나 깨달음을 체험하게 된다. 절정의 경험들(탄생 재체험,죽음의 문턱까지 여행하기, 생체 자기 제어[biofeedback],춤, 나아가 약물 등 변화된 의식 상태를 일으킬 수 있는 모든 것)은 일치와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고 여긴다. 하나의 정신만이 존재하므로, 어떤 사람들은 상위 존재들로 통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단일한 우주적 존재의 각 부분은 다른 모든 부분과 관계를 맺는다. 뉴에이지의 고전적 접근법은 자아 초월 심리학으로서, 그 주요개념은 우주적 정신, 상위자아, 집단 무의식과 개인 무의식, 개별 자아이다. 상위 자아는 우리의 실질적인 정체성으로서 , 신적 정신인 하느님과 인간을 이어 주는 다리이다. 영성개발은 주체와 객체 , 삶과 죽음, 영혼과 육체, 자아와 자아의 단편적 측면등 모든 형태의 이원론을 극복하는 상위 자아와 만나는 것이다. 우리의 제한된 인격은 실제 자아가 창조한 그림자나 꿈과 같다. 상위 자아는 전생의 기억을 지니고 있다.

                        

            3.   뉴에이지와 그리스도교 영성

 

 

                    3.1            영성으로서 뉴에이지

 

 

    뉴에이지는 이를 하나의 새로운 영성으로 장려하는 사람들이 흔히 일컫는 말이다. 고대 종교나 문화에서 수많은 개념을 차용해 온 것에 새로운(new)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나 진정 새로운 것은, 뉴에이지가 서구 문화와 그것의 유다-그리스도교적 뿌리에 대한 대안을 의식적으로 추구하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의 영성, 모든 인간이 느끼는 불완전성과 한계 의식을 치유해 주는 내적 경험, 곧 실재하는 모든 것과 조화와 일치를 이루는 내적 경험을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모든 생명의 핵인 우주의 신성한 힘이나 에너지외 심오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를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완성을 향한 길로 나아갈 수 있으며, 그리하여 자신의 개인 생활과 자신이 세상과 맺는 관계를 구분하고, 우주의 생성 과정 안에서, 또 끊임없이 진화하는 세상의 신기원(New Genesis)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역동적 에너지로 싹트는 우주에 대한 의식에 바탕을 둔 우주적 신비주의가51) 생겨난다. 따라서 우주의 에너지, 파장, 빛, 신, 사랑, 심지어 최고 자아등 이 모든 것은 하나이며 동일한 실재, 곧 모든 존재 안에 현존하는 최초의 근원을 가리킨다.

 

이러한 영성은 두 가지 뚜렷한 요소인 형이상학적 요소와 심리학적 요소로 구성된다. 형이상학적 구성요소는 뉴에이지의 밀교적이고 신지학적인 근원에서 비롯하며, 근본적으로는 새로운 형태의 영지주의이다. 신성에 대한 접근은 표면적인 것 이면의 실재적인 것, 시간 너머의 기원, 덧없는 것 너머의 초월적인 것, 사라질 전통 이면의 근원적인 전통, 자아 이면의 타자(他者), 육화된 개인 너머의 우주적 신성에 대한 개인적 추구를 통하여 숨겨진 신비를 이해하게 됨으로써 이루어진다. 밀교적 영성은 개별적인 존재들 너머로 신을 탐구하는 것으로서, 잃어 버린 일치에 대한 일종의 향수이다. 52)

 

여기서 우리는 밀교 영성의 영지주의적 모형(母型)을 볼 수 잇다. 그것은 물병자리 사람들이 종교의 초월적 일치를 추구할 때 명백해 진다. 그들은 역사적인 종교들에서 밀교의 핵심만 뽑아내려고 하며, 자신들이 그 수호자라고 자처한다. 어떤 식으로든 그들은 역사를 부정하며, 시간이나 어떤 제도 안에 영성이 뿌리내릴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나자렛의 예수는 하느님이 아니며, 우주적 보편적 그리스도의 수많은 역사적 발현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53)

 

이러한 영성의 심리학적 구성 요소는 밀교 문화와 심리학의 만남에서 비롯된다.(앞의 2.3.2 참조). 따라서 뉴에이지는 종교적 경험과 비슷하게, 개인이 심리적 영성적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 된다. 어떤 사람들은 개인적 위기가 오랜 영적 구도 끝에 깊은 신비 체험을 통하여 이러한 변화를 겪는다. 또 다른 사람들은 명상이나 일종의 치료법, 또는 의식 상태를 변화시키고 실재의 일치에 관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체험에서 이러한 변화를 겪는다. 54)

 

52. Jean Varnette. Lavventura spirituale dei figli dell Acquaril: Religiani e Sette nel Mando, 1996/2, 42면 이하.

53. 위와 같음

54. J. Gardon Melton , New Age Encyclopedia. 디트로이트, Gale Research, 1990년, 13-14면 참조,

55. D. Spangler. The Rebirth of the Sacred , 런던, Gateway Books, 1984년 , 78면이하.

56. D. Spangler. The New Age, 13면 이하.

 

 

 

 

                          3.2. 영적 자아 도취?

 

몇몇 저자들은 뉴에이지 영성을 일종의 영적 자아 도취 또는 거짓 신비주의로 본다. 뉴에이지의 대표 주자인 데이비드 슈팽글러도 이러한 비판을 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는 자신의 후기 저서에서, 밀교적 측면이 더욱 두드러진 이러한 뉴에이지 사조와 거리를 두었다.

 

그의 저술에 따르면, 더욱 대중적인 형태의 뉴에이지에서 개인과 집단은 흔히 은비론적이거나 천년 왕국설 형태로 스스로 모험이나 권력의 환상에 빠져 산다. .이러한 차원의 주요 특징은 자아 실현을 위한 내밀한 세계에 집착하고 그 결과 (언제나 명백하지는 않지만) 세상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뉴에이지는 낯설고 이색적인 존재들, 지도자, 열렬한 신봉자, 외계인들로 채워졌다. 뉴에이지는 심령술과 은비론적 신비, 음모와 비밀스런 가르침을 위한 자리이다. 55)

 

데이비드 슈팽글러는 한 후기 저서에서 뉴에이지의 부정적인 요소들 곧 뉴에이지의 어두운 그림자라고 여긴 것들을 열거하였다. 미래의 이름을 걸고 과거에서 멀어지는 것, 새로움 자체를 위하여 새로움에 집착하는 것,…….전체성과 친교라는 명목 아래 식별력과 통찰력 부족, 따라서 한계의 역할에 대한 이해나 존중 결여, 심령 현상과 지혜, 채널링과 영성, 뉴에이지 관점과 궁극적 진리 사이의 혼동 56)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슈팽글러는 결국 이기적이고 비합리적인 자아 도취는 소수의 뉴에이지 신봉자들에게만 국한되어 있다고 확신한다. 그는 뉴에이지가 변화의 이미지로서, 거룩한 것의 구체화로서, 대부분의 사람들을 매우 진지한 진리 추구자로 만드는 운동으로서 기능하며, 삶과 내적 성장에 관심을 갖게 한다고 강조한다.

 

미국 예수회 수사로서 뉴에이지 환경에서 여러 해를 보낸 데이비드 블란은 뉴에이지라는 이름을 달고 잇는 여러 제품과 치료법의 상업적 측면을 밝히고 있다. 그는 뉴에이지 신봉자들은 내면 생활을 발견하였고 세상에 책임을 진다는 전망에 이끌리지만 개인주의의 경향과 모든 것을 소비의 대상으로 보는 경향에 쉽게 넘어간다고 지적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뉴에이지 영성은 그리스도교적이라고 할 수 없으며, 자기 부정을 수반하지 않으므로 불교적이지도 않다. 신비로운 결합에 대한 꿈은 실제로는 단지 가사의 결합에 그치며, 결국 사람들을 더욱 외롭고 허전하게 만든다.

 

 

 

                       3.2            우주의 그리스도?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영지주의적 종교에 맞서야 하였다. 그들은 그러한 종교들을 무시하지 않고 도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우주의 신들에 사용되던 용어들을 그리스도에게 적응시켰다. 그 가장 분명한 예는 바오로 성인이 골로사이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그리스도께 대한 유명한 찬미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곧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왕권과 주권과 권세와 세력의 여러 천신들과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 그리스도는 또한 당신의 몸인 교회의 우두 머리이십니다. 그 분은 모든 것의 시작이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최초의 분이시며 만물의 으뜸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본질을 그리스도께 기꺼이 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과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곧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골로 1,15-20).

 

이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다가올 새로운 우주 시대가 없었다. 그들이 이러한 찬미가로 찬양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만물의 성취였다. 참으로 시간은 하느님께서 강생 안에서 인류의 역사 속으로 내려오셨다는 바로 그 사실로써 충만에 이르렀다. 영원이 시간 안으로 들어선 것이다. 이보다 더 위대한 성취가 또 있겠는가? 57) 우주의 힘과 어떤 불확실한 운명에 대한 영지주의적 믿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인격적 하느님과 관계를 맺을 가능성을 없애 버린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한 우주적 그리스도는 그 몸인 교회의 여러 지체들 안에 활발하게 현존하는 분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은 비인격적인 우주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인격적인 하느님의 사랑의 보호에 의존한다. 그들은 우주의 생명 중심주의는 (교회 안에서)일련의 사회적 관계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순환하는 우주의 사건들에 갇혀 있지 않고, 역사적 예수님, 특히 그 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신약성서에서, 뉴에이지의 사상에 암시되어 잇는 것과는 다른 하느님에 대한 교리를 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적 개념의 하느님은 삼위일체의 생명의 친교를 창조된 인간과 나누시려는 바람에서 인간을 창조하신 삼위의 하느님이시다. 이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참된 영성이란 우리가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으시는 것이다.

 

뉴에이지 세계에서는 이와는 완전히 다른 우주적 그리스도관이 통용되어 왔다. 우주적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 안에 결합되는 (그러나 그 인물에만 국한되지 않는)신적 모형이다. 이러한 신적 모형의 결합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세우셨다.(요한 1,14참조). 우주적 그리스도는 경쟁, 승자와 패자, 이원론, 인간 중심주의로 가득 찬 뉴턴의 기계론적 세계관의 구속성과 염세성, 그리고 약동하는 우주를 신비와 신비주의를 상실한 기계로 봄으로써 오는 지루함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우주적 그리스도는 지역적이고 역사적이며, 실제로 인류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다. 우주적 그리스도는 옆집에 살고 있을 수도 있고, 가장 깊고 가장 참된 자아 안에 있을 수도 있다. 58) 이러한 말은 뉴에이지에 관련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할지는 모르지만, 그 경향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으며, 두 가지 그리스도관이 어떤 면에서 차이가 있는지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다. 뉴에이지에서 우주의 그리스도는 여러 사람과 장소, 시간 안에 반복될 수 있는 하나의 모형으로서, 거기에는 엄청난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다. 우주의 그리스도는 궁극적으로는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모형이 아니라 하느님의 위격으로서 그분의 인간적 신적 모습은 모든 사람에 대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신비를 역사 안에서 드러 낸다(요한 3,16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생명을 우리와 나누시므로 우리 안에 사신다. 그러나 그것은 강요된 것도, 저절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도. 모든 사람은 그분의 생명을 나누어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살도록 초대받았다.

 

 

 

        3.4.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와 뉴에이지 신비주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성 생활은 하느님과 맺는 관계로서, 그 관계는 그분의 은총으로 점차 더욱 깊어지게 되며, 그 과정에서 우리의 동료 인간들과 또 우주와 맺는 관계에도 빛을 비추어 준다. 뉴에이지에서 영성이라는 말은 전체와 결합된 일치감으로 충만한 의식 상태를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신비주의’는 사랑이 충만한 초월적인 하느님을 만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함으로써 생기는 경험 , 곧 우주와 하나 된 기분 좋은 느낌, 커다란 존재의 바다 속에 잠기는 느낌을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59)

 

모든 차원에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와 뉴에이지 신비주의를 비교할 때 이러한 근본적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뉴에이지의 정화 방식은 불안이나 소외에 대한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이는 전체 안에 흡수됨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 변화하기 위해서 인간은 깨달음의 경험으로 이끄는 기법들을 사용하여야 한다. 이것은 개인의 의식을 의식을 변화시켜 실재의 가장 심오한 본질로 이해되는 신성과 접촉하도록 해 준다.

 

신을 위격으로 보지 않는 이러한 내재론적 종교 체계가 제시하는 기법과 방법들은 아래에서 생겨난다. 이러한 방법들은 인간의 마음이나 영혼 깊숙한 곳까지 내려가도록 하지만,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신성으로 나아가려는 사람의 처지에서는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계획이다. 이것은 흔히 내면의 신에 대한 해방의 깨달음으로 이해되는 것을 향한 의식 차원의 상승이다. 모든 사람이 이러한 기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 혜택은 영적 특권층에게만 제한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는 하느님께서 당신 창조물에게 , 특히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약하고 가진 것 없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이들에게 내려오신 것이다. 배워 두면 유익한 영적 도구들도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것들을 회피하시거나 무시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방법은 엄격한 의미에서 기교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니다. 기교로서 기도 방법은 복음이 강조하고 있는 어린아이 정신에 위배되는 것일지 모른다. 순수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기술과 전혀 무관하다. 그것은 언제나 하느님의 선물이며 또한 그 선물로부터 도움을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이 부당한 자임을 깨닫는다. 60)

 

그리스도인에게 회개는 성자를 통하여 성령의 힘에 순응함으로써 성부께 되돌아가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느님과 맺는 관계- 이는 언제나 또한 모든 면에서 거져 주어지는 은총이다.-가 발전하면 할수록, 하느님을 신뢰하며 의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마음가짐을 방해하는 죄와 영적인 근시안, 그리고 자기 심취에서 벗어나 회개할 필요성이 더욱 강해진다.

 

모든 명상 기법에는 억측과 자만심이 제거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자기 응시, 평상심, 자기 비움의 실천이 아니라 사라의 대화로서, 회개의 자세 곧 자기에게서 벗어나서 끊임없이 하느님 당신께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61)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느님의 뜻에 더욱더 완전히 순종하도록 이끌어 주며,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 형제자매들과 깊고 참된 연대를 이루게 된다. 62)

 

 

 

         3.5. 내면의 하느님 신화(神化: theosis)

 

    뉴에이지와 그리스도교의 핵심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다. 많은 뉴에이지 문화는 외부에는 실질적으로 나머지 실재와 구분되는 신적 존재가 없다는 확신에 차 있다. 융 이후 내면의 신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기류가 있어왔다. 뉴에이지는 우리의 문제는 우리 자신의 신성을 깨닫지 못하는 데에 있다고 본다. 우리는 우리의 감추어진 잠채력을 발산할 수 있게 하는 다양한 기법을 사용하고 지도를 받아서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잇다. 뉴에이지의 근본 사상은 우리 깊숙한 곳에 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신이며, 우리는 거짓됨의 껍데기를 벗겨 버림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무한한 힘을 발견한다. 63) 이러한 잠재력을 인식하면 할수록 이 잠재력을 더욱 많이 실현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뉴에이지는 신화(神化), 곧 신이 되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신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고유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신에 대한 이해를 내면화하여야 하는 시대, 곧 외부의 전능한 신에서 모든 존재의 핵심에 있는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힘인 신, 곧 영(靈)인 신으로 이해하여야 하는 시대 64)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57.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교서 제삼천년기(Terito Milennio Adveniente), 1994. 11.10,. 9항

58. Mattew Fox, The Coming of the Cosmic Christ, The Healing of Mother Earth and the Birth of Global Renaissance. 샌프란시스코, Harper & Row, 1988년, 135면.

59. 아르헨티나 주교회의 문화위원회 문서, Frente a una Era. Desaf oa Ia pastaral en el horizonte de la Nueva Evangelizaci n. 1993년, 참조.

60. 교황청 신앙교리성, 그리스도교 명상 23항

61. 교황청 신앙교리성, 그리스도교 명상. 3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묵상과 관상기도에 관한 부분, 2705-2719항을 보라.

63. Brendan Pelphrey, I said, You are Gods, Orthodox Christian Theosis and Deification in the New Religious Movements: Spirituality East and West , Easter 2000(13)참조.

64. Adrian Smith, God and the Aquarian Age The new era of the Kingdom, McCrimmons, Great Wakering, 1990년, 49면.

 

 

 

이레네오 성인 이단 반론(Adversus Haereses) 제5권의 서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분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하시려고 당신의 초월적인 사랑을 통하여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다. 고 말한다. 여기서 신화(神化), 곧 그리스도교에서 의미하는 신성화는 우리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작용하는 하느님 은총의 도움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의 불완전함과 죄를 반드시 인식하여야 하며, 결코 자아를 드높여서는 안 된다. 나아가 신성화는 일치를 이루면서도 서로 구분되는 완벽한 상태인 삼위일체의 생명에 참여하는 길을 열어 준다. 그것은 융합이라기보다는 상승 작용이다. 이 모든 것은 새로운 생명을 주는 인격적 만남의 결과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생명의 의식의 영역에 국한된,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이 아니며, 또한 단순히 새로운 차원의 인식도 아니다. 그것은 교회의 성사생활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의 영혼과 몸이 변화되는 것이다.

 

 

 

 

      4.   대조되는 뉴에이지와 그리스도교 신앙

 

 

 

     뉴에이지 종교성의 개별 요소들을 비록 그것들이 순수해 보일지라도 뉴에이지 운동의 전반적 사조에 깔려 있는 구조와 떼어놓기 어렵다. 이 운동의 영지주의적 특성 때문에 그것을 전체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으로 볼 때, 뉴에이지 종교성의 어떤 요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그 나머지는 거부해야 할 것으로 분리할 수는 없다. 뉴에이지 운동은 자연과 이루는 교감, 보편적 선에 대한 우주적 지식을 중요시하며,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계시된 내용들을 부정하기 때문에 , 그것을 긍정하거나 무해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종교적 상대주의의 특성을 보이는 문화 환경에서 뉴에이지 종교성을 그리스도교 신앙과 같은 차원에 두려는 시도에 대하여 경고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시도는 신앙과 믿음의 차이를 상대적인 것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신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더욱 큰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이와 관련하여, 그릇된 교리를 가르치거나 꾸며낸 이야기나 끝없는 족보 이야기에 정신이 팔린 사람들이 더러 있으니 그런 일을 못하게 하시오. 그런 것들은 쓸데없는 논쟁이나 일으킬 뿐이고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 해 주시는 하느님의 계획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1디모 1,3-4)라고 한 바오로 성인의 권고를 기억하는 것이 좋다. 일부 뉴에이지 관행들은 제품을 더 많이 팔려는 마케팅 전략으로 부적절하게 뉴에이지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실제로는 뉴에이지의 세계관과 관련이 없다. 이것은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 충실한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뉴에이지 운동에 속하는 요소들을 정확하게 가려낼 필요가 있다.

 

다음 질문들은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뉴에이지의 사상과 관행의 핵심 요소들을 평가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될 것이다. 뉴에이지는 신과 인간과 세계에 관한 개념들, 그리스도인들이 종교 문제를 두고 함께 대화할 수 잇는 사람들, 명상 단체를 위한 홍보물, 각종 치료법들, 종교에 관한 명시적 선언 등과 관계가 있다. 명시적으로 뉴에이지라는 이름을 달지 않은 개념이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아래의 질문들 가운데 일부는 그(것)들이 전반적인 뉴에이지 영역과 암암리에 또는 무의식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더 깊이 밝힐 것이다.

 

 신은 우리와 관계를 맺과 있는 존재인가? 우리가 사용하여야 할 그 무엇인가? 아니면 이용하여야 할 어떤 힘인가 ?

 

신에 대한 뉴에이지의 개념은 다소 모호한 반면, 그리스도교의 개념은 매우 명확하다. 뉴에이지의 신은 비인격적인 에너지, 또는 우주의 어떤 특별한 확장 또는 구성 요소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은 세상의 생명력 또는 정신이다. 신성은 가장 낮게는 광물계의 수정에서부터 우리가 아무것도 언급할 수 없는 은하계의 신에 이르기까지 등급에 따라 모든 존재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위대한 의식이다.65) 고전에 속하는 일부 뉴에이지 저술들은 인간이 자신을 신으로 생각할 수 있음을 분명히 드러낸다. 일부 사람들은 이러한 특성을 더 많이 지니고 있다. 신은 더 이상 세상 너머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내 안 깊숙한 곳에서 찾아야 한다. 66) 또한 이 내 밖에 있는 어떤 존재라 하더라도 조종할 수 있다.

 

이것은 하느님을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모든 인간 생명의 원천이라고 보는 그리스도교의 관점과 매우 다르다. 하느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인격적이신 성부, 성자, 성령이시며, 창조물인 인간과 당신 생명의 친교를 나누시고자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시다.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신(1디모 6,16)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자유로운 인간들을 당신의 외아들 안에서 자녀로 삼으시기 위하여 당신의 신적 생명을 인간들에게 주시고자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계시하심으로써, 인간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넘어서서 당신께 응답하고, 당신을 깨닫고, 사랑할 수 있게 하신다. 67) 하느님께서는 우주의 정신이나 기본에너지로 이해되는 생명 원리와 같은 분이 아니시며, 세상의 사랑과는 전혀 다른 사랑이시고, 만물 안에 창조적으로 존재하시며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한 분이신가, 아니면 수많은 그리스도가 있는가 ?

 

뉴에이지 문학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흔히 수많은 현자나 전수자, 또는 화신(化身) 가운데 한 명으로 제시되는 반면,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 다음은 뉴에이지 접근법의 몇몇 공통점이다.

 

-               인격적이고 개별적인 역사상의 예수는 영원하고 비인격적이며 보편적인 그리스도와 구별된다.

-               예수님을 유일한 그리스도로 여기지 않는다.

-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고통을 받을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배제하고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부인하거나 재해석한다.

-               외경들(예를 들면 신영지주의 복음들)을 성서 정경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예수님 생애의 여러 측면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참된 출처로 간주한다. 예수님에 관한 다른 계시들, 곧 실체적 존재나 안내령(案內靈), 승천한 스승들을 통해서나, 심지어 아카샤 연대기(Akasha Chronicicles)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예수님에 관한 다른 계시들이 뉴에이지 그리스도론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               성서 본문에 일종의 밀교적 해석을 적용하여, 그리스도교의 밀교적 정수에 다가가는 것을 방해하는 그리스도교의 형식적 종교성을 정화한다. 68)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이 말하는 나자렛 예수님이시고, 성모님의 아드님이시며,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시고, 참 인간이시고, 참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의 진리의 완전한 계시이시고, 세상의 유일한 구세주이시다. 그분은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수난하시고 묻히셨으며 성서 말씀대로 사흗날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 69)

 

     인간: 하나의 보편적 존재가 있는가, 아니면 여러 명의 개인이 있는가 ?

 

    뉴에이지 기법의 목적은 마치 실험 재료라도 되는 듯 신비상태를 마음대로 재현하는 것이다. 재생, 생체 자기 제어, 감각 분리, 홀로트로픽 호흡, 최면, 만트라, 단식, 수면 축출 요법, 초월명상 등은 신비 상태를 조절하고 그러한 상태를 지속적으로 체험하려는 시도들이다.70) 이러한 관행들은 모두 심리적으로 취약한(또 상처받기 쉬운)상태를 만들어 낸다. 수행의 목적이 우리 자신을 재창조하는 것이라면, 가 누구인가 하는 실질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우리 안의 신, 그리고 전 우주와 이루는 전체적인 결합은 이러한 질문을 강조한다. 고립된 각각의 인격은 뉴에이지(특히 자아초월 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병적이다. 그러나 정말 위험한 것은 전체적인 패러다임이다. 뉴에이지는 전체주의적 일치를 바탕으로 한 사상이기 때문에 위험하다.71) 좀 더 온건하게 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볼, 또 우리의 선택과 반응이 우리의 가장 깊은 요구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올 때, 우리의 행동과 감정 표현이 우리의 인격전반에 드러낼 때, 우리는 진정 참될 수 있다.72) 인간 잠재력 운동은 인간이 신이라는, 또는 인간은 자신 안에 신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에서 접근한다. 남자와 여자는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으며(창세 1,27참조), 하느님께서는 시편 저자가 깊이 감동할 만큼(시편 8장 참조)인간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신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온전히 밝혀지는 신비이며(사목헌장 22항 참조),사실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음으로써 진정 인간이 된다.73) 이것은 많은 뉴에이지 저자들과 실천가들이 그리스도교의 탓으로 돌리며 거부하는 왜곡된 인간 중심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65. Benjamin Crème. The Reappearance of Christ and the Masters of Wisdom,런던, Tara Press, 1979년 116면 참조.

66. Jean Vernette, Le New Agw, 파리, P.U.F., 1992(Collection Encyclopedique Que sais-je?), 14면 참조.

67. 가톨릭 교회 교리서 52항

68. A lessandro Olivieri Pennesi, II Cristo del New Age. Indagine Critica, 바티칸 시티, Libreria Editrice Vaticana, 1999, 특히 13-34면 참조. 공통점들에 관한 목록은 33면에 있다.

69. 니케아 –콘스탄티노 플리스 신경

70. Michel Lacroix, L’Ideologia della New Age, 밀라노 II Saggiatare, 1988년, 74면.

71. Michel Lacroix, L’Ideologia della New Age.68면.

72. Edw in Schur , The Awareness Trap . Self-Absarption instead of Social Change, 뉴욕, McGraw Hill, 1977년 , 68면

73. ‘가톨릭 교회 교리서’ 355-387항 참조.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하는가, 아니면 구원은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인가 ?

 

 문제는 우리가 무엇 또는 누구를 통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지 깨닫는 것이다. 흔히 뉴에이지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동으로 우리를 구원하는가, 아니면 하느님의 사랑으로 구원받는가? 핵심 단어는 자기 완성과 자기 실현, 자기 구원이다. 뉴에이지는 본질적으로 인간 본성에 관한 이해에서 펠라기우스 주의를 따른다. 74)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은 어떠한 기법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고, 하느님과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데에 달려 있다. 인간 조건은 원죄와 개인이 지은 죄에 영향을 받으므로 하느님의 행위로만 바로 잡을 수 있다. 죄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며, 하느님께서만 우리를 당신과 화해 시킬수 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서 인간은 하느님이시며 인간으로서 구원의 유일한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되었다. 그리스도교에서 구원은 자기 체험이나, 명상이나 직관을 통한 몰아(沒我)가 아니라, 오히려 죄의 용서, 자신 안의 깊은 양면성에서 벗어나는 것, 사랑의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의 은혜로써 본성을 다스리는 것이다. 구원의 길은 단순히 자신이 유도한 의식의 변화에서 발견 되는 것이 아니라, 죄와 그 영향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 사회에 내재한 죄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우리를 움직여 어려운 이웃과 사랑의 연대를 이루어 나가도록 한다.

 

 

 우리는 진리를 만들어 내는가, 아니면 진리를 받아들이는가 ?

 

 뉴에이지의 진리는 좋은 파장, 우주적 교감, 조화와 황홀경, 일반적으로는 즐거운 경험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행복의 요인에 따라 자기 자신의 진리를 발견하는 문제이다. 종교와 윤리적 문제에 대한 평가는 분명히 개인의 느낌이나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으로 제시된다. 그리스도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치들, 다시말해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알수 있는 객관적 실재를 이루는 일련의 객관적인 요건들을 온 삶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74. Paul Heelas, The New Age Movement . The Celebration of the Self and the Sacralization of Modemity, 옥스퍼드, Blackwell, 1996년, 161면 참조.

75. 아일랜드 신학위원회, A Catholic Respanse to the New Age Phenamenon. 1994년 제3장.

76. 교황청 신앙교리성. ‘그리스도교 명상’ , 3항

 

 

 기도와 명상: 우리 자신에게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께 말하는 것인가 ?

 

 

심리학과 영성을 혼동하는 경향 때문에 현재 쓰이는 많은 명상 기법들이 기도가 아니라고 주장하기 어려워졌다. 그러한 기법들은 흔히 마음을 즐겁게 하거나 몸을 편안한 상태로 이끌기는 하지만, 기도를 위한 훌륭한 준비일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그 경험은 참으로 강렬하지만, 이러한 상태에 머무는 것은 혼자 있을 때만 가능하지 아직 다른 사람 앞에서는 불가능 하다. 침묵에 도달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말없이 관상하는 것 이라기 보다는 공허함을 가져다 줄 뿐이다. 또한 자신의 영혼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는 신이 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호소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찾고 계신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면 그러한 방법들은 그리스도교의 기도가 될 수 없다. 이러한 경험이 우주의 에너지와 맺는 관계라고 생각할 때에도, 하느님의 역할이 우리의 모든 요구를 채워 주는 것이라고 보는 ,하느님과 갖는 그러한 손쉬운 관계는 뉴에이지의 핵심에 놓여 있는 이기심을 보여 준다. 75)

 

뉴에이지 관행들은 일반적으로 우주 에너지와 갖는 결합이나 자기 성찰의 문제라는 면에서 진정한 기도는 아니다. 자기 성찰인 동시에 본질적으로는 하느님과의 만남인 그리스도교 기도의 두 가지 지향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단순히 인간적 노력과는 거리가 먼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본질적으로 자아에게서 벗어나서 끊임없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회개의 태도를 뜻하는 76) 대화이다. 그리스도인은 혼자일 때와 은밀하게 기도할 때에도 그 자신이 항상 그리스도와 성령과 모든 성인과 일치하여 교회의 선익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한다. 77)

 

 

 

 우리는 죄를 부정하려는 유혹을 받는가, 아니면 죄의 존재를 인정하는가 ?

 

 뉴에이지에는 진정한 죄의 개념이 없으며 불완전한 지식의 개념만이 있다. 필요한 것은 특정한 심리적-육체적 기술을 통하여 이를수 있다는 깨달음이다. 뉴에이지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믿어야 할 것, 하여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에 관하여 듣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실재를 탐구하는 수천 가지의 방법이 있다. 자신의 지성과 직관이 이끄는 곳으로 가라, 자신을 믿어라. 78) 하는 말을 들을 것이다. 신의 위치에 있던 권위가 자기 내면으로 옮겨 간 것이다. 뉴에이지 사상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는 것은 개인의 잘못이나 죄가 아니라 전체 우주에서 분리되는 것이다. 그 대책은 전 존재 안으로 더욱더 깊이 몰입하는 것이다. 일부 뉴에이지 저술과 관행에서는, 한 번의 생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거듭되는 환생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충분히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교 관점에서는 죄의 실재, 특히 원죄의 실재는 오로지 하느님 계시의 빛으로 밝혀진다. 하느님께 대한 계시가 없다면 우리는 죄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으며, 단지 죄를 성장의 결함, 심리적 나약함, 어떤 잘못, 또는 부적합한 사회구조에서 나오는 필연적 결과 등으로 설명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앎으로써만,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들이 그분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할 수 있도록 주신 자유를 오용하는 것이 죄임을 이해하게 된다. 79) 죄란 이성과 진리의 올바른 양심을 거스르는 잘못이다. 죄는 어떤 것에 대한 비뚤어진 애착 때문에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참다운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죄는 인간의 본성에 상처를 입히고 인간의 연대성을 해친다..80) 죄는 하느님께 대한 모욕이다..죄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거슬러 맞서며, 우리 마음을 하느님에게서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한다. .그러므로 죄는 하느님을 업신여기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81)

 

 

77. 교황청 신앙교리성, ‘그리스도교 명상’ 7항.

78. Willian Bloom. The New Age, An Anthology of Essential Writings, 런던, Rider. 1991년, 16면.

79. ‘가톨릭 교회 교리서’ , 387항.

80. ‘가톨릭 교회 교리서’ , 1849항.

81. 같은 곳 , 1850항

82.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구원에 이르는 고통’(Salvificidoloris) , 1984.2.11..19항.

 

 

 고통과 죽음을 거부하라고 하는가, 아니면 받아들이라고 하는가 ?

 

 일부 뉴에이지 저자들은 고통을 자업자득, 악업, 또는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결과로 본다. 어떤 이들은 성공과 부를 얻는 방법들에 몰두한다.(예를 들면, 디팍 초프라 , 호세 실바 등). 뉴에이지에서 환생은 영적 성장의 필수 요소로서,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되어 우리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는 점진적인 영적 진화의 한 단계로 이해된다. 현생에서 다른 이들의 죽음을 체험하는 것은 유익한 위기감을 불러 일으킨다.

 

우주적 일치와 환생은 둘다, 인간은 특별한 존재로서 자신에게 모든 책임이 주어지는 단 한 번의 삶을 산다는 그리스도교의 믿음과 상충한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책임과 자유를 동시에 위태롭게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업이 고통을 통하여 성취되었을 뿐아니라,인간 고통 자체가 구속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는 당신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으시면서 죄의 악 일체를 스스로 짊어지셨다. 이 악의 경험이 비할데 없을 만큼의 그리스도의 고통을 결정지었으며, 그리스도의 이 고통이 구속의 대가가 되었다..구속자께서는 인간을 대신하여 그리고 인간을 위하여 고통을 받으셨다. 인간 누구나 구속사업에서 자기 자신의 몫을 가지고 있다. 또한 각자가 모두 구속사업이 성취되게 한 그 고통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모든 인간 고통마저 구속되게 한 그 고통에 참여 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고통을 통하여 구속 사업을 완수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인간 고통을 구속의 차원에까지 들어 높이셨다. 이리하여 인간 각자는 자기 자신의 고통을 겪으면서 또한 그리스도의 구속적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82)

 

 

 

 

 

 

 사회 참여는 회피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적극 추구해야 하는 것인가?

 

 뉴에이지에는 뻔뻔스럽게 자신을 드높이는 경향이 많이 있지만, 이 운동의 몇몇 지도자들은 , 소수의 이기적이고 무분별하며 자기 도취적인 사람들을 보고서 전체 운동을 판단하거나 일부 기괴한 행위들 때문에 당혹스러워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며 그 때문에 뉴에이지의 참된 영적 추구와 영성이 가려진다고 주장한다. 83) 그리스도교는 개인을 우주적 자아에 결합시키는 것, 곧 우주적 조화 안에서 차이나 대립을 없애거나 상대화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참 사랑이 있는 곳에는 어떤 다른 (사람)이 있어야 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선물에 다른 사람이 긍정이나 부정의 답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인정하면서 일치를 추구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합일을 친교로, 일치를 공동체로 이해한다.

 

 

 우리의 미래는 별 안에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미래 건설을 돕고 있는가 ?

 

다가오는 새 시대(뉴에이지)에는 자연의 우주 법칙을 완전히 통제하는 완벽한 양성(兩性)존재들이 살게 될 것이다. 이러한 각본에 따르면, 그리스도교는 사라지고 범세계적 종교와 새로운 세계 질서에 자리를 내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깨어 있으면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마지막 날을 준비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새 시대(뉴에이지)는 2천년전, 다름 아닌 나자렛 예수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분은 모든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이시다. 그분의 성령은 모든 사람의 마음안에, 사회와 역사, 민족과 문화와 종교 안에 현존하며 활동하신다. 사실, 성자께서 아낌없이 베풀어 주신 성부의 영은 모든 이에게 생기를 주시는 분이시다. 84)

우리는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다.

 

   다른 한편, 언뜻 보기에 뉴에이지와 관련된 사람들에게는 많은 뉴에이지 관행들이 교리적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이러한 관행들이, 사고에 영향을 미치고 현실에 대한 매우 특정한 가치관을 주입시킬 수 있는 성향을 전달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분명히 뉴에이지는 그 나름의 환경을 만들고 있으며, 해롭지 않은 것과 정말 문제 삼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뉴에이지 세계에 퍼져 있는 그리스도 교리는 헬레나 블라바츠키의 신지학 가르침 , 루돌프 슈타이너의 인지학, 그리고 앨리스 베일리의 비밀 학교(Arcane School)등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두는 것이 좋다. 현대의 뉴에이지 추종자들은 그들의 사상을 장려할 뿐만 아니라, 뉴에이져들(New Agers)과 함께 전혀 새로운 현실 이해, 곧 일부 관찰자들이 뉴에이지 진리 85)라고 일컫는 교리를 발전시키려고 한다.

 

 83. David Spangler , The New Age, 28면.

 84.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 (Redemptaris Missio), 1990.12.7.6 28항과 교황청 신앙교리성, 선언 주님이신 예수님(Daminus Iesus), 12항 , 2000.8.6.참조.

 85. R. Rhodes, The Counterfeit Christ of the New Age Movement. 그랜드 래피즈, Baker, 1990년, 129면.

 

 

 

l               많은 사람이 동양의 지혜에서 빌려 오는 것은 해가 되지 않는다고 믿지만 , 초월 명상법의 경우, 비록 그 지도자들이 그것이 종교적으로 중립적이라고 주장한다 하더라도 ,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의식적으로 다른 종교(이 경우에는 힌두교)에 몰두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주의시켜야 한다. 명상법을 배우는 것에는 문제가 없지만, 수행의 대상이나 내용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해 주신 하느님과 관련이 있는지, 어떤 다른 계시와 관련이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숨겨진 내면의 자아와 관련이 있는지를 명백히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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